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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나라(明朝)의 건국과 멸망

SBP 2025. 5. 30. 09:08
명나라(明朝)의 건국과 멸망

명나라(明朝)의 건국과 멸망 (1368년 ~ 1644년)

명나라는 몽골족이 세운 원(元)나라를 몰아내고 한족(漢族)이 다시 중국 대륙의 주도권을 되찾아 건국한 통일 왕조입니다. 약 276년간 지속되며 강력한 황제권을 바탕으로 안정된 사회를 구축하려 했으나, 내부적인 모순과 외부의 위협으로 인해 결국 멸망에 이르게 됩니다.

명나라의 건국

원나라 말기, 민족 차별 정책과 과도한 세금, 자연재해 등으로 민심이 이반하고 각지에서 농민 반란이 끊이지 않았습니다. 그중 가장 세력이 컸던 홍건적의 난(紅巾賊之亂)을 통해 새로운 왕조의 기틀이 마련되었습니다.

  • 주원장(朱元璋)의 등장: 빈농 출신으로 홍건적에 가담한 주원장은 뛰어난 지도력으로 점차 세력을 확장했습니다. 그는 다른 군웅들을 격파하고 강남 지역을 장악했습니다.
  • 명 건국 (1368년): 주원장은 남경(南京, 당시 응천부 應天府)을 수도로 삼아 황제에 즉위하고 국호를 '대명(大明)', 연호를 '홍무(洪武)'라 하니, 이가 바로 명 태조 홍무제(明太祖 洪武帝)입니다. 이후 북벌을 단행하여 원나라 세력을 몽골 고원으로 몰아내고 중국 통일을 달성했습니다.

초기 명나라: 체제 정비와 번영

홍무제와 그의 아들 영락제 시기 명나라는 국가의 기틀을 다지고 강력한 국력을 과시하며 번영을 누렸습니다.

홍무제의 치세 (1368년 ~ 1398년)

홍무제는 강력한 황제 중심의 중앙집권 체제를 구축하는 데 힘썼습니다.

  • 황제권 강화: 중서성(中書省)과 승상(丞相) 제도를 폐지하고 6부(六部)를 황제 직속으로 두어 모든 권력을 황제에게 집중시켰습니다.
  • 공신 및 관료 숙청: 수차례의 대규모 옥사(獄事, 호유용의 옥, 이선장의 옥, 남옥 등)를 일으켜 공신과 관료들을 숙청하고 황제권을 위협할 수 있는 세력을 제거했습니다. 엄격한 법전인 《대명률(大明律)》과 교화서인 《대고(大誥)》를 반포했습니다.
  • 민생 안정 및 경제 회복: 토지 조사 사업(어린도책 魚鱗圖冊 작성)과 호구 정리(부역황책 賦役黃冊 작성)를 통해 조세 제도를 정비하고, 농업 생산력 회복에 주력했습니다. 이갑제(里甲制)를 실시하여 향촌 사회를 통제했습니다.

정난의 변과 영락제의 치세

정난의 변 (靖難之役, 1399년 ~ 1402년)

홍무제가 손자인 건문제(建文帝)에게 황위를 물려주자, 건문제는 숙부인 번왕(藩王)들의 세력을 약화시키는 정책(삭봉책 削封策)을 추진했습니다. 이에 홍무제의 넷째 아들이자 북방의 강력한 번왕이었던 연왕(燕王) 주체(朱棣)가 반란을 일으켰습니다. 3년간의 내전 끝에 주체는 남경을 함락하고 황제에 즉위하니, 이가 바로 명 성조 영락제(明成祖 永樂帝)입니다.

영락제(1402년 ~ 1424년)는 명나라의 국력을 대내외적으로 크게 떨친 황제입니다.

  • 수도 이전 및 궁궐 건설: 수도를 남경에서 북경(北京)으로 옮기고, 오늘날까지 남아있는 자금성(紫禁城)을 건설했습니다.
  • 대외 원정 및 교류:
    • 여러 차례 몽골을 친정(親征)하여 북방을 안정시키려 했습니다.
    • 환관 정화(鄭和)에게 대규모 함대를 이끌고 동남아시아, 인도, 아라비아 반도, 아프리카 동해안까지 이르는 7차례의 대원정을 명하여 명나라의 국위를 선양하고 조공 무역을 확대했습니다.
  • 문화 사업: 방대한 규모의 유서(類書)인 《영락대전(永樂大典)》을 편찬했습니다. 내각(內閣) 제도를 강화하여 황제의 정치 자문을 담당하게 했습니다.

중기 명나라: 안정과 위기의 교차

영락제 사후, 명나라는 한동안 비교적 안정된 시기를 보냈으나 점차 내부적인 문제들이 드러나기 시작했습니다.

  • 토목보의 변 (土木堡之變, 1449년): 환관 왕진(王振)의 전횡으로 인해 오이라트(Oirat) 몽골과의 전쟁에서 황제 영종(英宗)이 포로로 잡히는 치욕적인 사건이 발생했습니다. 이는 명나라의 군사적 약점을 드러내고 황실의 권위를 실추시켰습니다.
  • 북로남왜(北虜南倭): 북쪽에서는 몽골족의 침입이 계속되었고, 남쪽 해안에서는 왜구(倭寇)의 노략질이 극심하여 국가 재정에 큰 부담을 주었습니다. (척계광 戚繼光의 활약)
  • 환관의 전횡과 붕당: 황제들이 정사를 소홀히 하면서 환관들이 막강한 권력을 휘두르기 시작했고(왕진, 유근, 위충현 등), 관료들은 붕당(朋黨)을 이루어 정쟁을 일삼았습니다.
  • 장거정(張居正)의 개혁 (1573년 ~ 1582년): 만력제(萬曆帝) 초기, 재상 장거정은 강력한 개혁(일조편법 一條鞭法 전국 확대 등)을 추진하여 국가 재정을 확충하고 행정 기강을 바로잡아 일시적으로 명나라를 중흥시켰으나, 그가 죽은 후 개혁은 대부분 수포로 돌아갔습니다.

명나라의 쇠퇴와 멸망

만력제 중반 이후, 명나라는 급격한 쇠퇴의 길로 접어들었습니다.

  • 만력제의 태업(怠業): 장거정 사후 만력제는 약 30년간 정사를 돌보지 않고 사치와 향락에 빠져 국정은 극도로 문란해졌습니다.
  • 재정 파탄과 군사력 약화: 임진왜란(壬辰倭亂) 파병 등으로 막대한 재정을 소모했고, 군대의 기강도 해이해졌습니다.
  • 동림당(東林黨)과 엄당(阉黨)의 대립: 사대부 관료들인 동림당과 환관 세력(엄당) 간의 극심한 당쟁으로 국론이 분열되고 정치는 마비 상태에 이르렀습니다.
  • 만주족(여진족)의 흥기: 북방에서는 누르하치(努爾哈赤)가 여진족을 통일하고 후금(後金, 이후 청 淸)을 건국하여 명나라를 압박해왔습니다. 사르후 전투(薩爾滸之戰)에서 명군은 대패했습니다.
  • 농민 반란의 격화: 계속되는 기근과 과도한 세금 부담으로 전국 각지에서 농민 반란이 폭발적으로 일어났습니다. 그중 이자성(李自成)과 장헌충(張獻忠)의 세력이 가장 강력했습니다.

명나라 멸망 (1644년)

1644년, 이자성이 이끄는 농민 반란군이 수도 북경을 함락시켰습니다. 마지막 황제인 숭정제(崇禎帝)는 경산(景山)에서 스스로 목숨을 끊었습니다. 이로써 명나라는 건국 276년 만에 멸망했습니다.

이후, 명나라 산해관(山海關) 총병이었던 오삼계(吳三桂)가 이자성을 공격하기 위해 만주족의 청나라 군대를 끌어들였고, 청나라가 중국 대륙 전체를 장악하게 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남명 南明 정권의 저항도 있었으나 결국 진압됨)

명나라의 문화와 유산

분야 주요 내용 및 특징
사상 주자학(朱子學)이 관학(官學)이었으나, 중기 이후 양명학(陽明學 - 왕수인 王守仁)이 등장하여 새로운 학문적 흐름 형성. 실학 사상도 맹아.
문학 장편 소설이 크게 발달하여 《삼국지연의(三國志演義)》, 《수호전(水滸傳)》, 《서유기(西遊記)》, 《금병매(金瓶梅)》 등 걸작 탄생. 희곡도 발달.
예술 도자기(청화백자, 두채 등) 기술이 절정에 달함. 전통 회화와 공예 발달. 자금성, 명 효릉 등 건축물.
과학 기술 이시진(李時珍)의 《본초강목(本草綱目)》, 송응성(宋應星)의 《천공개물(天工開物)》 등 실용적 학문 발달.
사회 경제 농업 생산력 증대, 수공업 발달, 상품 화폐 경제 발달 (은 銀의 광범위한 유통). 상인 집단(휘주 상인, 산서 상인) 성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