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나라의 멸망과 그 후
진나라(秦朝)의 멸망과 그 후
중국 역사상 최초의 통일 제국이었던 진나라는 강력한 중앙 집권 정책과 법치주의를 바탕으로 짧은 기간 존속했지만, 중국 역사에 큰 족적을 남겼습니다. 그러나 그 가혹한 통치와 무리한 사업은 결국 급격한 멸망을 초래했고, 이후 새로운 시대로 이어지는 과도기를 맞이하게 됩니다.
진나라 (BC 221년 ~ BC 206년)
진시황은 전국시대를 종식시키고 중국을 통일하여 황제 제도를 창시하고, 도량형, 화폐, 문자 등을 통일하는 등 강력한 국가 체제를 구축했습니다. 만리장성 건설, 아방궁 축조 등 대규모 토목 사업을 벌였으며, 분서갱유를 통해 사상 통제를 시도하기도 했습니다.
진나라 멸망의 원인
진나라의 멸망은 여러 복합적인 원인이 작용했습니다.
- 진시황 사후의 정치적 혼란: 진시황 사후, 환관 조고(趙高)가 권력을 장악하고 2세 황제 호해(胡亥)를 조종하며 정치가 극도로 문란해졌습니다.
- 가혹한 법치와 과도한 부담: 엄격한 법 적용과 대규모 토목공사, 잦은 전쟁 동원으로 백성들의 고통이 극에 달했습니다.
- 농민 반란의 확산: BC 209년, 진승(陳勝)과 오광(吳廣)이 일으킨 농민 반란을 시작으로 전국 각지에서 반란이 연이어 발생했습니다.
- 구 귀족 세력의 반발: 과거 6국의 귀족들이 진나라에 대한 반감을 품고 반란에 가담하거나 독자적인 세력을 형성했습니다.
진나라 멸망 과정
진승·오광의 난 이후, 항량(項梁)과 그의 조카 항우(項羽), 그리고 유방(劉邦) 등 여러 군웅들이 등장하여 진나라에 대항했습니다. 진나라 군대는 이들 연합 세력에게 거듭 패배했으며, BC 207년 거록대전(鉅鹿大戰)에서 항우가 진나라의 주력군을 격파하면서 멸망은 결정적이 되었습니다. 결국 BC 206년, 유방이 수도 함양(咸陽)에 무혈 입성하고 진왕 자영(子嬰)이 항복함으로써 진나라는 15년 만에 멸망했습니다.
진나라 멸망 후: 초한쟁패(楚漢爭霸) (BC 206년 ~ BC 202년)
진나라가 멸망한 후, 중국 대륙은 다시 혼란에 휩싸였습니다. 가장 강력한 세력으로 부상한 인물은 귀족 출신의 항우와 평민 출신의 유방이었습니다.
- 항우의 패권: 항우는 스스로 서초패왕(西楚霸王)이라 칭하고, 18명의 제후를 책봉하며 사실상의 최고 권력자로 군림하려 했습니다. 그러나 그의 논공행상은 공정하지 못했고, 많은 제후들의 불만을 샀습니다.
- 유방의 성장: 한왕(漢王)으로 봉해져 변방으로 밀려났던 유방은 한신(韓信), 장량(張良), 소하(蕭何) 등 유능한 인재를 등용하여 세력을 키웠습니다.
- 4년간의 대결: 약 4년에 걸쳐 항우의 초(楚)나라와 유방의 한(漢)나라 간에 치열한 전쟁이 벌어졌습니다. 이를 '초한전쟁' 또는 '초한쟁패'라고 합니다. 주요 전투로는 팽성 전투, 형양·성고 전투, 해하 전투 등이 있습니다.
초반에는 항우가 군사적으로 우세했지만, 민심을 얻고 전략적으로 뛰어났던 유방이 점차 전세를 역전시켰습니다. BC 202년, 해하 전투(垓下戰鬪)에서 사면초가(四面楚歌)의 고사로 유명한 결정적인 패배를 당한 항우는 오강(烏江)에서 자결했습니다.
한나라(漢朝)의 건국 (BC 202년)
항우를 물리치고 최종적으로 승리한 유방은 황제의 자리에 올라 한 고조(漢高祖)가 되었으며, 장안(長安)을 수도로 삼아 한나라를 건국했습니다. 한나라는 진나라의 제도를 상당 부분 계승하면서도, 군국제(郡國制)를 실시하고 유가(儒家) 사상을 통치 이념으로 점진적으로 받아들이는 등 보다 안정적이고 유연한 통치 체제를 구축해 나갔습니다.
한나라는 이후 약 400년간 지속되며 중국 문화의 황금기를 열었고, 현재 중국인과 중국 문자를 지칭하는 '한족(漢族)', '한자(漢字)' 등의 용어에 그 이름이 남아 있을 정도로 중국 역사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습니다.
영향 및 의의
구분 | 내용 |
---|---|
통일 제국의 계승 | 진나라가 이룩한 통일의 기반 위에서 한나라는 더욱 안정적이고 지속적인 제국을 건설했습니다. |
중앙집권과 지방분권의 조화 | 진의 엄격한 군현제 대신, 한 초기에는 군현제와 봉건제를 절충한 군국제를 시행하여 점진적인 중앙집권화를 추구했습니다. |
문화적 발전의 토대 | 한나라는 진의 분서갱유와 같은 극단적인 사상 통제에서 벗어나 학문과 문화가 발전할 수 있는 토대를 마련했습니다. 특히 한 무제 시기 유교가 국교화되면서 중국 사상사의 중요한 전환점을 맞이합니다. |
'중국' 정체성 형성 | 한나라 시기를 거치며 '중국인'으로서의 문화적, 민족적 정체성이 강화되었습니다. |